[레터]언젠가 꽃 피울 계절을 위해

1.
나는 어느 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친구들과 밤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시기에 내가 간직하고 있던 것들이다. 그렇게 떠올린 것을 한 군데 모아놓고 멀리서 지켜보면, 그것은 대체로 '낭만'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그리운 순간들이었다.

2.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요즘 너의 글이 우울해서 걱정이야. 잘 지내는 거지?"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했다. 기쁠 때는 글을 쓰기 어려우므로, 나는 주로 우울할 때 글을 썼다. 어쩌면 행복한 상태를 기본으로 두고, 우울함과 외로움은 일종의 질병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글쓰기는 어느 정도 치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살이 조금 쪘고, 쉽게 피로감을 느끼지만 건강하게 잘 지낸다. 어디선가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3.
싱가포르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가 있었다. 낯선 건물과 한국과는 묘하게 다른 시스템들,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말레이어와 인니어가 공존하는 이 나라에 조금씩 익숙해질 쯤이었다. 나는 셰어하우스에 하루 종일 박혀있다가 끼니를 때우러 밖으로 나왔다. 가로등이 켜진 저녁이었는데도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근처 호커센터에 자리를 잡고 볶음밥과 타이거 맥주를 주문했다. 볶음밥은 안남미로 만든 고슬고슬한 중국식 볶음밥이었고, 맥주는 얼음이 담긴 잔과 함께 병으로 줬다. 나는 목이 따가울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주변 풍경을 살폈다. 'Old Airport Road'라는 낡은 표지판 너머로는 가끔씩 오토바이만이 빠르게 지나갔다.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의 주황빛과 장사를 정리하는 노점의 전등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주 예전부터 내게 일어났던 모든 순간들이,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세상에 우연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의 이면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어설픈 운명론자가 되었다.

4.
내 삶은 기대에 못 미치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런 순간도 어떻게든 긍정해보려고 했던 시도들이 결국 세상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지금은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도 언젠가 기회를 만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 복선이 우리의 삶을 완벽한 서사로 만든다.

2021년 5월 셋째 주
언젠가 꽃 피울 계절을 위해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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