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책장을 정리하며

나는 정리하기를 좋아한다. 정리를 하다 보면 나의 지난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정리가 끝나면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좋아하고 필요한 것들만 남게 된다. 그러니까 정리는 후련하고 기쁜 일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이를테면 책장 정리가 그렇다. 

어제는 책장을 정리했다. 책장에 공간 모자라 책들이 쌓여버린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책을 사모았던 탓이다. 결국 내가 가진 책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계획했다. 한동안 펼쳐보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 펼쳐보지 않을 책들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책장 앞에 앉아 책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부활>, <안나 카레니나>, <구토> 같은 고전 소설은 '언젠가는 읽을 거야'라고 몇 년째 다짐했던 책들이다. 그런데 두꺼운 책은 점점 읽을 엄두가 안 난다. 조금 읽다가도 금방 포기하게 된다. 이러다 영영 장편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나의 청소년기를 함께 했다. 홍세화 작가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도 그렇다. 너무 많이 읽은 탓에 책장이 너덜너덜 해졌다.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집은 스무 살의 어지러운 마음을 낭만으로 채워주었다. 이 책들은 이제 그 책임을 다했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애정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잡문이었다. 고민 없이 정리하기로 한다. 그래도 하루키의 책은 <상실의 시대>를 포함해 다섯 권이나 남겨두었다. 그러니 그도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경영서와 자기 계발서를 탐독할 시절이 있었다. 그 책들을 보니 일을 잘하고 싶었던 그때의 마음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한 사람의 몫을 해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었다. 이제는 읽지 않는 걸 보니 나는 분명 성장한 모양이다.

가장 난감한 것은 친필 사인을 받은 책이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이라 해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마치 편지를 버리는 것만큼 죄책감이 든다. 그만큼 인연이라는 건 무겁고 강력한 것이다. 물론 김승옥 작가에게 사인을 받은 <무진기행>은 평생 가보로 남겨둘 거다. 순천에서의, 그때의 만남을 생각하면 지금도 영혼이 떨린다.

그런 식으로 정리하다 보니 떠나보낼 책들이 한가득 모였다. 모두 차곡차곡 쌓아 상자에 넣는다. 그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마음이 쓰이긴 하지만 슬픈 안녕은 아니다. 스승을 떠나는 제자의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그동안 가르치고, 위로하고, 지켜봐 주어서 고마웠습니다.

2023년 1월 13일
책장을 정리하며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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