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이 좋다. '처음'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도 좋고,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이야기들도 좋다. 갓난아이의 걸음마라든지, 여행자의 두리번거림이라든지, 태양이 떠오를 때 서서히 밝아지는 세상이라든지. '처음'을 생각하면 그런 이미지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런데 막상 나의 '처음'들을 돌아보면 괴로운 기억이 더 많다. 무엇이든 처음 겪는 일은 어지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내게 처음은 언제나 낯설었고, 낯섦 앞에서 나는 늘 바보가 되었다. 모든 처음이 그랬다.

예를 들어, 처음 학교에 가는 날에는 두려운 마음이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교실에 모인 낯선 얼굴들이 무섭기도 했다. 혹시 나를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잔뜩 긴장했다. 사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을 가득 지닌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다들 나와 다를 것 없이 바보, 멍청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두려운 마음은 사라졌다.

첫사랑이라고 다를까. 아마 불안한 마음이 더 컸을 거다.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함께 있는 동안 전전긍긍했을 테니 말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이나 순수한 미소는 긴장이 풀린 뒤에야 떠오르는 것들이다. 부끄럽지만, 대학시절 좋아하는 선배와 했던 첫 데이트는 정말 엉망이었다. 이성에게 서툴렸던 나는 어색한 침묵을 해소하려고 의미 없는 말을 잔뜩 지껄였다. 그날 본 영화의 줄거리나 먹은 음식의 맛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선배와의 두 번째 데이트는 없었다. 그날의 나에 대한 혐오감과 비참함을 안주 삼아 술도 참 많이 마셨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후련하고 뿌듯할 줄 알았는데 안 그랬다. 첫 책은 여행 에세이집이었는데, 서투른 글쓰기와 모자란 편집 실력으로 밤을 새우며 만들었다. 인쇄소에 출력을 맡긴 날에는 '어쩌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내내 후회했다. 책에서 오타를 발견했을 때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좌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일들도 처음이라는 이유로 거대하고 무겁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이 좋다. 가끔은 처음이 그립기도 하다. 그런 강렬한 감정은 오직 그때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그것을 잘 극복했기에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가 앞으로 겪을 '처음'의 수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처음은 처음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이 아니다. 이런 마음이 쌓이면서 우리는 처음에 능숙해지고 있다.

요즘은 내가 지니고 있던 것들을 마무리하는 시기다. 그건 '오늘로써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하는 날이 많다는 의미다. 그런 날이면 나는 언제나 처음을 생각한다.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그렇지만 무척이나 서툴렀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용케 잘 해냈네.'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마음도 든다. 그러면 보내는 마음이 조금은 수월해진다.

2년 간 진행하던 팟캐스트를 올해로 마친다. 처음 녹음하던 날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어 다행이다. 오랜 꿈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022년 12월 20일
처음을 생각하며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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