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나에게 <무진기행>의 무진 같은 곳이다. 강릉에 오면 나는 속절없이 옛날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미처 두고 오지 못한 고민도, 켜켜이 쌓인 감정도 이곳에 오면 모두 깨끗이 잊게 되었다.

안부가 궁금하다는 친구의 말에 기차를 탔다. 2년 만이었다. 고향의 시내는 제법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알던 가게는 보이지 않고, 대신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시내를 걸었다. 낡고 익숙한 간판들을 찾아다녔다. 종종 '여기는 아직 그대로네.' 하며 마음을 달랬다. 오거리 횡단보도에는 여전히 신호등이 없었다. 그것이 반가웠다.

강릉에는 나의 초라했던 시절이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군 전역까지 십여 년을 강릉에서 지냈다. 내 생애 가장 방황하던 날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유 모를 불안과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견디지 못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온몸으로 아프게 느꼈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강릉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주 찾지는 않았다. 어릴 적에 쓴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처럼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나는 늘 그렇게 다짐했었다.

저녁에는 고향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요즘은 친구나 오랜 지인을 만날 때마다 서로의 결이 크게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해 각자의 경험을 동력 삼아 서서히 분화한다. 나와 다를 바 없던 친구들은 어느새 저 멀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은 추억이다. 추억이 있기에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되어 만난다.

강릉에 오면 나는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하던 내가 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가게처럼, 신호등도 없이 길을 건너야 하는 오거리처럼, 언제나 함께였다는 듯 그때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2022년 12월 14일
강릉에서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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