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나를 스쳐 지나간 감정들

1.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할아버지는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암. 도와주세요. 살고 싶어요.'라고 적혀있었다. 새까만 매직으로 거칠고 엉성하게 쓴 문장들이 너무 처연하고 절실해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2.

요즘은 소설 수업을 듣고 있다. 소설을 써보니 에세이를 쓸 때보다 더 솔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의 내가 아닌 허구의 인물과 상황을 앞에 내세웠을 때, 오히려 나의 감정과 욕망과 삶을 깊은 곳까지 드러낼 수 있었다. 한 소설가는 이렇게 썼다. '모든 소설은 궁극적으로 자전적이다.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 이 말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3. 

음악에는 시절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체험에 가깝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어, 나미의 '슬픈 인연'을 들으면 온 가족이 탄 자동차 뒷좌석에서 카세트테이프로 그 노래를 듣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애드 시런의 'photograph'를 들으면 템스강에서 버스킹 공연을 보던 이십 대의 내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노래는 듣지 않는다.

4.

서점 매대에서 내 책을 발견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너무 반갑고 기특해서 괜히 쓰다듬어보고 페이지도 스르륵 넘겨보고 진열도 매만져주었다. 멋지고 쟁쟁한 책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주눅 들어 보이기도 했다. 키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귀엽고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사람들이 읽어보지는 않을까 괜히 주위를 서성이다가 왔다. 묘한 기분이었다.

2023년 7월 5일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며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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