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도, 소설도, 영화도 사랑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그토록 사랑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종종 그런 천연함에 놀라곤 한다. 내게는 사랑이 어색하다. 요즘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기도 어렵다. 그 단어를 발음할 때는 꼭 보이지 않는 힘이 내 입술을 오므려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게 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말을 육성으로 듣게 될 때면 괜히 부끄럽고 무안해진다. 이상하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유독 ‘사랑’이라는 낱말이 어색해진 이유는 열렬한 시기를 이미 지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이 집중하고 있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되어 삶을 함께 꾸려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치열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곳에는 더 이상 설레는 감정이나 떨림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짝사랑에 대해 쓰기로 한다. 요즘 쓰는 글이 나처럼 지루하고 건조해진 것만 같아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었던,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간에 사랑은 하고 싶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스무 살 즈음이었다. 남몰래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다. 특유의 밝음과 씩씩함이 좋았다. 모두 나에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대단해 보였다. 보고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간혹 대화라도 하게 되면 나는 당황해서 실속 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주말에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힘이 생겨났다.

하지만 막상 약속한 장소에 나갔을 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나갈 수 없다는 메시지만이 내 손에 놓여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처음엔 걱정스러웠고 그러다가 화가 났고 마지막에는 의아해졌다. 만나고 싶다가도 만나고 싶지 않아 지고, 가까워지고 싶다가도 멀어지고 싶은 것. 그건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미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관계는 흐릿한 미련으로 남았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대 때는 그런 식으로 몇몇의 짝사랑이 쉽게 들어오고 나가며 애정의 공백을 채워주었다.

짝사랑은 분명 삶의 활력이 되었다. 설령 그게 환상이라 해도 그랬다. 한 사람에 대한 환상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게다가 선을 지킨다면 누구에게 피해가 갈 일도 없었다. 거절당할 일도, 서로에게 실망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나의 밑바닥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누군가에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건, 영영 저버린 줄만 았았던 이 세상을 다시금 긍정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짝사랑은 이토록 무해하고 이로웠다.

하지만 때가 되면 짝사랑은 끝이 나야 한다. 너무 길어진 짝사랑은 더 이상 상호 간의 사랑이 아니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풍선처럼 자꾸만 부풀어져 실제를 넘어서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가진 붓으로 그리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생각날 때마다 그 사람을 그렸다. 더 이상 그릴 곳이 없어서 그린 곳 위에 자꾸만 덧칠을 했고 결국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짝사랑이 깊어지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랑하게 된다. 아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짝사랑은 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대부분 제거되어 있었다. 나는 결국 누군가에게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상처를 감내하고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고 조건 없이 헌신하며 한층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을 그토록, 나조차도 벅차도록 생각하고 소망하고 그리워한 시간이 나를 한층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사랑이 어색해진 내게도 그토록 순수하고 찬란한 순간들이 있었다.

2024년 4월 8일
윤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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